외국인 유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동양 학생과 서양 학생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내가 만난 학생을 모두 셈해도 끽해야 일이천 명에 불과하고 소수의 학생이 각 나라의 대표성을 띤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지만 말이다. 내가 경험한 학생으로 한정한다면, 동양 학생은 공부할 때 어휘와 문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교사 의존도가 높은 반면 서양 학생은 말하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교사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동양 학생은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데 익숙하고 서양 학생은 함께 떠들며 공부하는 데 익숙하다. 동양 학생은 선생님을 자신보다 상위자라고 수직적으로 인식하는 반면 서양 학생은 선생님을 자신과 동등한 위치라고 수평적으로 인식한다. 내가 만난 학생은 거개가 그러했다. 여러 심리
성균관대학교 중앙학술정보관 앞에는 유학자의 동상이 하나 세워져있다. 일반적으로 유학자의 동상이라면 단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유학자의 동상은 바람에 휘날리는 두루마기를 걸치고 하늘을 향해 굳게 쥔 주먹을 쭉 뻗은, 역동적인 모습과 신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유학자의 동상은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1879.7.10.~1962.5.10)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김창숙 선생은 1879년 7월 10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사면 칠봉동에서 유림으로 명망 높은 김호림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명문가답게 가풍은 엄격했으나 김창숙 선생의 아버지 김호림은 당시 일반 양반과는 달리 상당히 개화된 생각을 가진 유학자였다고 한다(일하는데 있어 귀천을 따지지 않았으며, 고용인
고신대학교 간호대학에서 학생 간 소위 ‘삥뜯기’가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졸업생들에게 선물할 반지를 제작한다는 명목으로 연간 약 10만원의 돈을 강제로 내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학교 측은 이에 대해 학생들 간에 합의한 행사일 뿐이라며,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대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학생들은 이와 같은 갈취에 불만을 갖고 있지만 내지 않을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돈을 내지 않으면 이미 돈을 냈던 선배들에게 지불을 강요당하거나 심한 경우 학과 구성원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당 간호대 학생 A 씨는 “전공책 값, 복사비, 식비, 교통비 등 대학 생활하기에 필수적으로 써야하는 비용도 많은데 졸업생 선배들에게 줄 반지 값까지 강요당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학생
지난 13일(금), 오후 3시에 57분 경 중부내륙고속도로 서울방향 254km 지점에서 강동대학교 25인승 통학버스와 25톤 화물차, 승용차가 3중 추돌해 1명이 숨지고 20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화물차 운전자 A 씨가 숨졌고, 강동대 통학버스에 타고 있던 학생 19명과 운전자가 다쳐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다. 강동대 학생과 통학버스 운전자의 생명은 지장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통학버스에 타고 있던 학생 A 양은 “버스 기사님이 갓길로 화물차를 피해서 큰 사고가 나지 않아 크게 다친 학생은 없었고 뼈가 부러지거나 타박상을 입은 학생들이 대부분이다”고 전했다. 이날 사고는 2차선으로 달리던 화물차가 앞서가던 버스를 들이받은 뒤 1차선으로 달리던 승용차를 연이어 추돌하면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내 건물 다수에서 지난 2014년 석면이 검출됐지만 이를 3년째 방치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지난 11일(수) 더불어민주당 소속 신동근 의원이 문화재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조사한 결과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석면의 제거는 하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석면은 국제암연구소에서 지정한 1급 발암물질이다. 신 의원은 문화재청이 제출한 석면조사 자료에서 한국전통문화대의 건물 38곳 중 11곳에서 석면이 검출됐다고 전했다. 신 의원은 “조사 결과 학생식당과 생활관 등 다수의 학생들이 이용하는 공간에서 석면이 검출됐다”며 “해당 공간은 위험성을 고려해 석면 제거 조치에 나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해당 건물들이 학생들에게 크게 위험이 되지 않
국가장학금 구제 신청하세요! 2017학년도 2학기 국가장학금 2차 신청자 중 재학생을 대상으로 구제 신청을 받는다. 신청 기간은 11월 21일(화)까지다. 구제 신청은 재학 중 1회만 가능하며, 구제 신청을 통해 국가 장학금을 수혜했을 경우에만 횟수를 차감한다. 구제 신청은 한국 장학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할 수 있다. 우리 함께 금연해요! 본교에서 동작구 보건소와 함께 금연 클리닉을 운영한다. 금연 클리닉은 10월 25일(수)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에서 4시까지 운영되고, 학생회실 506호 보건실에서 참여할 수 있다. 참여자에게는 니코틴 보조제를 지급하며, 금연교육 및 상담이 이루어진다. 기업 현장과 실무에 대해 알아봐요
지난 10일(화), 본교가 개교 120주년을 맞이했다. 본교는 12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거쳐 지금 이 자리에 도달했으며, 그 역사의 중심에는 수많은 숭실인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어떤 이에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었을 것이며, 어떤 이에겐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해준 교류의 장이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이에겐 살면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해준 곳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2017년 현재, 숭실 구성원들에게 숭실대학교란 어떤 곳일까? 지금부터 본교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본교의 의미를 본지와 함께 알아보자. 나에게 숭실대는 ‘마이크’다. 숭실대학교는 나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김유진(회계·16) 나에게 숭실대는 ‘막걸리’다. 막걸리는 발효될수
2017년 10월 10일, 본교는 올해로 개교 120주년을 맞이했다. 매년 돌아오는 개교기념일이지만, 올해는 그 무게가 남다르다. 1897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 박사가 평양에 ‘숭실학당’을 설립한 그 날부터 본교는 근 120년 동안 여러 번의 고비를 넘기면서 ‘한국 최초의 근대 대학’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다. 개교 이후 일제 치하에 전개된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본교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여러 지식인을 배출했으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기 위해 1938년 3월 자진 폐교를 결정했다. 그러나 본교는 폐교와 6.25 전쟁 등 만만치 않은 고비에도 불구하고, 1954년 5월 서울에 재건됐다. 이후 본교는 1971년 대전대학교와의 통합 및 숭전대학교로의 발전, 그리고
19세기말 뉴욕과 에딘버러에서 에큐메니칼 선교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선교대회는 피선교지에서 교파간 연합사업의 추진을 장려하였다. 한국에서도 선교사들 사이에 교파간 연합사업안이 공론화되었고, 베어드는 1905년 6월 북감리교선교회 총회에 참석하여 한국 내 고등교육에 있어서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동 방안을 제의하였다. 감리교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06년 ‘숭실학당’ 내에 ‘대학부’가 설치되었다. 이로써 국내 최초의 근대대학인 ‘숭실대학’이 탄생하였다. ‘숭실대학’이 출범하자, 장로교는 교수진으로 교장인 베어드 부부와 맥큔 등을 임명하였고, 감리교는 베커와 빌링스, 루퍼스 등 세 사람을 지원하였다. 장·감 선교회의 연합으로 학생 수가 급속히 증가하자, 교사 증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베어드는
나치 독일이 항복한 후에도 일본은 전쟁의 야욕을 거두지 않았다. 전범국 일본은 점령 지역의 곳곳에 숨어서 반인륜적 학살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일본의 무모한 행동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1945년 7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은 이 도시의 체칠리엔호프 궁전(Schloss Cecilienhof)에서 만나 전후 세계질서를 논의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국사시간에 수없이 외웠던 포츠담 회담(The Potsdam Conference)이다. 이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은 재확인되었고,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이 요청되었다. 회담 후 발표된 선언은 독일의 작은 도시 포츠담을 한국인에게는 그 의미를 간과할 수 없는 ‘큰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유럽인은 로코코 양식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1998년, 처음으로 이메일 주소를 갖게 되었다. 쓰는 데 편지보다 힘이 덜 들고 보내는 즉시 상대방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메일이 신통방통하게 느껴졌다. 편지지도 선택할 수도 있고 배경 음악도 넣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더는 편지도 이메일도 보내지 않게 되었다. 이메일도 구식이 된 시대에 학생들은 카카오톡을 이용해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글을 제대로 써 본 일이 없고 써 볼 일도 없으니 글쓰기가 영 자신 없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글쓰기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근래 속속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책을 펼쳐 보면 실망하기 일쑤다. 원론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에 머물고 있거나 글의 구조와 원리를 지루하게 설명하고 정서법을 지적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
이육사(본명은 원록이다. ‘이육사’는 1927년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의거’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 간 옥고를 치렀을 당시의 수인번호인 264를 따서 지은 필명이다.)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 조국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담겨진 작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민족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이육사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의 전문이 실려 있어, 설령 문학이나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번쯤 그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육사는 윤동주와 더불어 문학을 통해 일제에 저항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육사의 삶과 문학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 이육사의 시가 어떻게 일제의 검열과 방해를 피해 우리에게 전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