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의 고발로 시작된 미투 운동이 한창이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미투는 항상 있었지만 주류 언론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일상을 살면서도 내 앞에 놓인 선택지들을 고르기 바빠서 이것이 어떤 구조를 통해서 내 눈앞에 있는지 잊기 마련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 구조인 경제학에 대해 간단하게 배우지만 기억나는 것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정도이다. 바로 그 ‘애덤 스미스’는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욕구가 교환을 통해서 충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가 빼먹은 것이 있었다. 그가 연구를 하면서도 밥을 먹고 입고 잘 수 있게 한 어머니의 ‘돌봄노동’이다. 경제학은 시작될 때부터 여성의 노동은 포함되지 않았다. 1950년대 들어서 시카고 학파의 ‘게리 베커’라는
책의 주인공인 ‘핍’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간다. 고아 출신의 낮은 신분에서 뜻밖의 사건으로 인한 신분상승으로 런던에서 신사수업을 받지만 결국 모든 유산을 잃고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일대기를 겪으면서 핍은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지만 겉만 치장된 사실상 거짓 신분으로 살아갔었고 결국 거짓된 모습을 잃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핍의 인생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책의 제목 ‘위대한 유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유산’이란 무엇일까? 어린 시절 핍에게 물어본다면 핍은 많은 돈과 높은 지위, 명예를 답할 것이다. 한 마디로 어린 시절의 핍은 ‘성공’을 바라고 있었다. 핍
이번에는 최후의 도시다. 미로 속을 달리던 소년들의 여정은 이제 최후의 도시로 향한다. 제임스 대시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가 3부작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돌아왔다. 미로에 갇힌 소년들의 사투를 다루었던 1편 (2014)와 플레어 바이러스로 폐허가 된 도시 ‘스코치’의 스토리를 다 루었던 2편 (2015)에 이어 이번에는 이 모든 의문점을 해소할 수 있는 최후의 도시로 소년들이 떠난다. 표면적으로는 위키드에게 납치당한 친구들과 민호(이기홍)를 되찾기 위한 여정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내면에 담긴 이야기들은 조금 더 복잡하다. ‘글레이드’라는 미로를 벗어나자마자 토마스(딜런 오브라이언)와 친구들이 마주한 세상
이 책은 동일한 제목의 영화를 보고 난 후에 글로 접했다. 이 책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한 시골 마을에 사는 베넷 가엔 조용하고 진중한 성격의 첫째 ‘제인’, 활발하지만 지혜로운 둘째 ‘엘리자베스’, 그리고 3명의 동생들이 있다. 어느 날 그 옆 마을에 신분이 높은 부자인 ‘빙리’와 그 친구 ‘다아시’가 이사 온다. 첫째 언니 제인과 빙리는 사랑에 빠진다. 한편 다아시는 엘리자베스를 경멸하는 듯한 말을 하게 되고, 이에 엘리자베스는 그런 말을 한 다아시를 매우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아시가 그녀와 그 가족을 알아갈수록, 그리고 엘리자베스도 그를 좀 더 알아갈수록 자신의 생각이 오만에서 비롯된 편견임을 깨닫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책에선 오만
추리소설의 여왕 ‘아가사 크리스티’의 저서 이 다시 한번 영화화되었다. 그녀가 쓴 80여 편의 추리 소설 중에서도 수작으로 손꼽히는 은 이미 시드니 루멧(1974)과 칼 슈엔켈(2001) 감독에 의해 스크린 진출을 마친 상태였다. 탐정물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은 케네스 브래너 감독에 의해 다시 한번 스크린으로 옮겨지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본래 대중에게 잘 알려진 명작을 반복적으로 영화화한다는 것은 이미 줄거리가 노출되어 있기에 쉽지 않은 도전이다. 그러나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연출과 더불어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로 분하며 그만의 색채가 가득한 을 완성했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불어 넣은
“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 인류는 늘 의문을 가졌기에 더욱 나은 삶을 찾아 나설 수 있었다. 누군가는 로봇 시대가 언젠가 우리를 산불처럼 뜨겁게 집어삼킬 것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를 준 것이라고 말한다. 세계의 중심에는 늘, 우리 인간이 있다는 것을 잊은 채. 우리 엄마, 아빠 세대에는 서로 연락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번호를 직접 외워서 다녔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번호를 직접 외우는 일은, 그들을 향한 애정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은 핸드폰이 다 기억해주니 그럴 필요가 없다. 번호를
압구정의 한 DVD방, 한때는 핫 플레스임이 분명했던 공간이지만 이제는 폐업조차 마음대로 하기 힘들다. DVD방의 사장 두식(신하균)과 아르바이트생 태정(도경수)의 처지도 이 암울한 공간과 닮아있다. 야간 대리운전을 하며 투잡을 뛰는 두식, 그는 사장이지만 밀려가는 월세에 허덕이는 을이다. 갚아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학자금 대출에 허덕이는 태정 역시 생활고에 허덕이는 을이다. 두 인물의 암울한 사정은 사장과 아르바이트생 모두를 을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렇기에 돈이 최고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이 돈을 위해 벌이는 사투가 영화의 핵심 갈등이 된다. 영화의 제목인 ‘7호실’은 바로 이 DVD방을 의미한다. 밀실과 같은 ‘7호실’은 영화 속에서 서로 다른 목적을 보여주는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자신의 힘든
황정은의 소설을 읽은 지가 꽤나 오래되었다. 2016년 말에 출간되었음에도 최근에서야 읽게 된 소설 ‘아무도 아닌’은, 내용과 무척이나 걸맞는 표지를 가지고 있었다. 회색으로 칠해진 소설 표지는 예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소설들의 분위기도 그랬다. 어쩐지 눈앞에 뿌옇게 안개가 낀 듯 흐릿하고, 그렇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그 흐린 시야에 조금 우울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단편 속 화자들은 뿌연 시야 속을 헤매며 혼자 생각하고, 답을 찾으려 한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게 정말 정답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황정은의 소설을 읽다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리틀리 스콧 감독의 저주받은 SF 걸작 가 (이하 2049)의 타이틀을 달고 속편으로서의 화려한 귀환을 이룩했다. 전편이 도시와 복제인간이 공존하는 2019년의 로스엔젤레스를 다뤘다면 에서도 역시 어둡고 무거운 도시사회의 디스토피아를 드러내고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LA, 빽빽하게 자리한 마천루와 네온사인, 인간과 복제인간이 인파 속에 자리하며 드러나는 필름누아르의 감성은 이제 2049년의 캘리포니아로 시선을 돌린다. 반란을 일으킨 복제인간으로 인해 복제인간 제조에 주력했던 타이렐사는 파산을 맞는다. 그러나 니앤더 월레스(자레드 레토)가 유산을 손에 넣으며 그는 복제인간으로 우주를 장악하는 꿈을 꾼다. 한편 블레이드 러너들은 인간
이념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이념 때문에 갈등을 빚는 것일까? 사람들 사이에서 이념이라는 것은 그만큼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념의 대립은 현실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이념의 대립은 해소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판문점은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작중에서 주인공 ‘진수’는 기자 신분을 빌려 판문점으로 가게 된다. 작가는 그를 통해 남북의 대립이 이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냉철하고 사실적으로 지적해내며 대립의 당사자들인 남북 양측 모두를 비판한다. 또한 작가는 이념 대립이 매우 소모적이라는 것을 밝히고 이제는 그러한 대치 구도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한다. 이는 진수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람들이란 참 묘
영화 로 로맨틱 코미디의 새 지평을 열었던 ‘마크 웹’ 감독이 이번에는 천재 소녀와 함께 돌아왔다. 마크 웹 감독의 신작 는 수학 천재 소녀 ‘메리 에들러’(매케나 그레이스)의 성장기다. 영화는 미적분을 손쉽게 푸는 7살 천재 소녀의 양육권을 둘러싼 할머니와 삼촌의 법정 공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실 할리우드 영화 속 ‘천부적인 재능’은 전형적이다 못해 식상한 소재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마크 웹 감독은 영화 속에 지나친 갈등과 뚜렷한 선악 구도를 배치하는 대신 정공법을 택한다. ‘메리’의 천재성만큼이나 그녀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흔히 천재가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그 재능을 발현시키는데 집중하지만 는 천재성 위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
개강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수업들이 내 숨을 조여온다. ‘수강신청을 성공했는데 주5일 1교시라니……’ 통학을 하는 학생으로써 매일 밤 다음날 아침 일어날 생각을 하면 숨이 탁 막힌다. 잠에서 덜 깨고, 아침밥으로 인한 엄마와의 다툼으로 머릿속 열기가 식지 않았을 때 지하철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잔잔한 인디 음악을 들으며 책을 펴면 나름 시간이 기분 좋게 잘 간다. 그 중 최근에 읽은 한 권의 책에 꽂혔다.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제일 시간이 빨리 간 책이다. 영화로는 보지 않았다, 실망할 것 같아서.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1세기를 산 정치적으로도, 다른 모든 입장에서도 중의적인 노인 ‘알란’이 너무나도 따분한 노인정의 생활에서 충동적으로 탈피하고 싶어서, 창문을 뛰어넘어 무
강원도 산골과 뉴욕을 넘나들며 봉준호 감독의 2017년 추격전이 시작된다. 목적은 납치당한 슈퍼돼지 ‘옥자’를 집으로 귀환시키는 것, 이를 위해 옥자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인 산골 소녀 미자(안서현)가 신발 끈을 고쳐 맨다. 영화 는 봉준호 감독이 공인한 첫 번째 ‘사랑 영화’이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전원의 파라다이스를 연상케 하는 강원도 산골 속, 소녀 미자와 옥자는 서로가 서로의 친구가 되어주며 끈끈한 유대를 쌓아 나간다.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쓸 줄 아는 이들의 낙원은 욕심내지 않기에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옥자’의 존재 자체가, 영화가 가지는 모든 모순의 시발점이 된다. 유전자 변형에 의해 탄생한 ‘옥자’는 현대 자본주의 탐욕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식품으로서의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무한한 삶.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일생, 즉 하나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미쳐 버렸을 것이다.”작가에게 1991년은 세계관의 원점이었다고 한다. 역사를 회의하고 진실을 열망하게 된 분기점이었다. 소설 속 화자는 1991년 5월 투쟁이 끝난 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 대학생이다. ‘나’는 소용돌이 안에서 분투하고 자유를 열망하지만 소용돌이의 밖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를 통해 격정의 90년대를 바라본다. 작품 속에는 1990년대를 살아가는 ‘나’와, 그 주변부의 인물과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역사적 기록에서 조명 받지 못한 개인의 진실을 파고들었다. 소설은 나의 ‘일생’을 다루지만 수많은
동생이 사라졌다.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형이 만들어 준 종이배를 빗물에 띄우러 나간 동생 조지는 다시 형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음에도 빈번하게 실종사건이 이어지는 마을 ‘델리’, 여전히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간직한 형 빌(제이든 리버허)은 직접 동생을 찾아 나서기로 결정한다. 그의 동행에는 자신들을 ‘루저 클럽(Loser club)’이라 부르는 6명의 친구들이 동참한다. 스티븐 킹의 원작 소설 ‘그것’은 동명 영화로 탄생되어 2017년의 호러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1986년 출간 이래로 2주 만에 100만 부 이상의 수익을 올린 ‘그것’은 스티븐 킹의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가 135분의 러닝타임으로 영상화되며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공포들이 본격적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주인공 뫼르소는 세계 전체에 대한 이방인이다. 그는 책 전반에 걸쳐 다소 냉담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단지 ‘칼날에 비친 태양이 너무 눈부셨다’는 이유만으로 아랍인에게 총을 난사해 죽게 만든 뫼르소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보통 사람은 못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뫼르소는 정말 악인이었을까? 또, 그는 사람들이 흔히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특별한 인물이었을까? 그는 세계에 속하지 못했다. 그건 아주 특별하거나 이상한 현상일까?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은 없다. 하물며 막역지우 사이에도 벽 하나 쯤은 존재한다. 우리는 자신의 바깥에 대해 냉담해진다. 뫼르소는 그저 얽혀든 것이다. 혹은 약간 더 냉담했을 뿐. 만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또 하나의 실사 영화가 탄생했다. 바로 프랑스 덩케르크에 고립된 영국 군인들을 대대적으로 구출했던 다이나모 작전을 실사화 한 영화 가 그 주인공이다. 영화는 무엇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첫 장편 실사 영화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놀란 감독이 의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두고, “시각적인 스토리텔링”의 결과물이라고 말한 만큼, 영화는 현실의 시간을 재구성하는 생존형 드라마의 형태에 가깝다. 그렇기에 (1998)의 스펙터클한 전쟁 씬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를 다소 심심한 영화로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놀란의 첫 실사 영화 는 실제 전쟁에서 사용된 군함을 공수하는 등 당시 전쟁 현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대부분의 로맨스 소설에는 공식 같은 설정이 있다. 잘난 주인공들이 불타는 사랑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는, 이를테면 ‘독자들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설정’이다. 이러한 대리만족 요소는 로맨스 소설이 꾸준히 사랑받아 온 이유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0년 넘게 사랑받아 온 ‘로맨스 소설’ 에서는 이러한 공식을 찾아볼 수 없다. 특별히 잘나거나 못난 곳 없는 주인공들은 그저 덤덤히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며 이따금 서로를 무심한 듯 애틋하게 보듬어줄 뿐이다.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성장 소설에 로맨스라는 요소가 가미된 것 같을 정도다. 그러나 감히 추측건대, 이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이유는 그러한
호러 장르가 담아낼 수 있는 보편적 테마 중 하나는 바로 ‘타자에 대한 공포’이다. 낯선 존재의 위협, 외지에서의 공포와 같이 익숙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오는 공포야말로 우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영화 역시 타자에 대한 공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이 영화가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99%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장르 영화로서의 특성에 있다. 450만 달러라는 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흑인 코미디언으로 잘 알려진 조던 필레의 연출 데뷔작이다. 단순한 호러 영화로 치부하기엔 영화 속에 담긴 사회 비판적 메시지와 시각이 거미줄처럼 조밀하고 단단하다. 흑인 감독의 두 눈에 비친, 여전히 잔존하는 인종차별의 문제가 각 시퀀스마다 의미와 상징을 부여하며 얽혀있다. 조던 필레 감독
그냥 골랐다. 서점에 들어선 상태였고, 아무 책을 들고 구석에 앉아 읽고 싶었다. 푹신한 카펫 바닥, 조용조용한 인디 음악, 그리고 무엇보다 공기. 가습기로 적당한 습도를 맞추고, 디퓨저와 책의 냄새로 정화시킨 공기, 그리고 공기를 가르는 페이지를 ‘사라락’ 넘기는 소리. 이 책을 왜 골랐는지 잘 모르겠고, 그저 본능이었다. 표지 색감, 확실히 따뜻하다. 딱딱하고 그립감이 좋은 하드커버, 딱 내 스타일이었다. 가난한 대학생에게 결제가 아깝지 않은 순간은 몇몇 없다. 이 책은 아무런 내적 갈등 없이 카드를 긁게 했다. 나의 개인적 의견이다. 이 서적은 ‘새벽’에 읽기 좋다. 술을 먹고 기분이 좋아져서 들어왔거나, 야구장에서 광기로 응원을 하고 들어와서 느끼는 그런 ‘새벽’이 아니다. 첫 번째 문단에